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바이올린이 연주되던 상황은 귀족의 거실이나 댄스홀이었다. 파가니니의 등장과 함께 바이얼린은 중산층 청중을 대상으로 하는 공개연주회 무대에 서야 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는 야외음악회에도 동원되어 보다 강력한 음량과 표현력이 요구되었다. 바이올린이 계속 그 힘을 더해온 사실 때문에 여성적인 악기라는 대명사도 불필요한 것이 될는지도 모른다. 바이올린 줄을 양쪽에서 잡아 당기는 힘 즉 장력이 더 강화되었고 브리지의 높이도 올라갔다. 이러한 여러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과 같은 바이올린이 탄생된 것이다. 따라서 바이올린의 생일을 정확하게 알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꾸준한 악기 개량과 실험을 통해 서구 합리주의의 음악적 산물이 탄생되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바이올린은 그 볼륨의 크기와 화려함을 계속해서 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바이올린만큼 가격이 천차만별인 악기도 없을 것이다. 스트라디바리, 아마티, 과르네리 등 오늘날에는 거의 재생 불가능한 명기들은 그 골동품적인 가치와 함께 수십억원에 달하는 값이 매겨지고 있다. 바이얼린과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그 맛이 진하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그가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죽고 난 다음 그러니까 18세기말부터의 일이다. (그를 다룬 소설이 세광출판사에서 나와 있다.) 니 콜로 아마티를 사사한 그는 100년이 넘도록 노하우가 축적되어 온 크레모나 지방의 바이올린 제작 기술의 전통을 전수받았다. 제작자의 이름을 따서 스트라디바리 또는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불리는 그의 바이올린은 현재 약 650점이 남아 있으며,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소장하고 있으면서 지금도 세계 각지의 음악무대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1644년에 태어나 1737년에 세상을 떠난 스트라디바리는 거의 70년동안 바이올린 제작에 종사했다. 1666년부터 1680년 사이에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그가 주로 하프, 류트, 만돌린 등의 악기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악기로 바이올린이 가장 많고 첼로와 비올라도 꽤 남아 있다. 바이올린의 명인으로 유명했던 파가니니도 생전에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비올라를 얻게 되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명기를 연주하기 위해 베를리오즈에게 비올라 협주곡을 위촉했는데, 그 결과 나온 것이 베를리오즈의 이탈리아의 해롤드라는 곡이다.
 스트라디바리의 기나긴 생애 중 몇차례의 중요한 변화의 계기를 만나게 된다. 1680년 피사 산타 도메니코로 이사를 간 것과 1698년 스트라디바리의 첫째 부인이 사망하여 이듬해 안토니아 마리아 짐벨리와 결혼해 5명의 아이를 더 나은 것이다. 그의 황금기는 둘째 부인과 결혼해 안정을 되찾아 작업에 몰두한 1700년부터 1720년까지이며 특히 1715년이 제작 기술의 절정에 도달한 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도 1715년산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은 최고가를 호가하는 명기로 손꼽힌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명기 과르네리, 아마티 등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적잖이 많은 수량이 남아있는 편이다. 그래서 이름을 구분해 주기 위해 그동안 소장했던 유명인의 이름을 붙이거나 악기 특유의 음색과 특징을 사람이름에 빗대어 별명을 붙여 부르는 경우가 보통이다. 1694년의 베츠, 1715년의 알라드, 1716년산 메시아가 그 대표적인 예다. 베츠는 베츠라는 악기상인이 불과 1파운드에 구입한 악기로 현재 미국 워싱턴 국회도서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알라드는 전문가들이 현존하는 최고의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으로 평가하고 있는 명기 중의 명기. 메시아는 스트라디바리가 죽은 다음 그의 가문에 오랜동안 남아있던 것으로 악기상 타리시오에게 완벽한 상태로 넘어갔다가 다음 구매자인 비욤이 약간 변형시켰다. 그러나 현존하는 스트라디바리 중 원형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바이올린은 현재 옥스포드의 아시몰리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스트라디바리가 제작한 바이올린을 소장하면서 연주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로는 피에르 아모얄(1717년 코찬스키), 알프레도 캄폴리(1700년 드라고네티), 지노 프란체스스카디(1727년 하트), 아르투르 그뤼미요(1727년 거인), 야사 하이페츠(1731년), 프리츠 크라이슬러(1734년), 기돈 크레머(1734년), 예후디 메뉴인(1714년 소일), 이차크 펄만, 헨릭 셰링, 요제프 수크 등이 있다.
 자크 티보가 베리오에게 물려받아 소장하고 있던 1709년산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은 교통사고로 티보와 함께 운명을 달리 했다. 한편 유진 이자이에게는 아이작 스턴에게 물려준 과르네리 말고도, 1732년 제작의 스트라디바리 헤라클레스가 있었는데, 1909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도난당한 이후 영영 못찾고 있다.
 스트라디바리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도 영원한 명기로 남아있는 것은 그 제작기술이 신비에 싸인채 전수되지 않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스트라디바리를 오늘날 재현하려는 노력은 많았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 현악기 최고의 명품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의 비밀은 나무좀벌레를 막아주는 특수 약품 처리에 있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과학 전문지 네이처를 인용,30일 보도했다.
미국 텍사스A&M대학 조지프 나지바리 박사 연구팀은 스트라디바리가 1717년에 제작한 바이올린과 첼로,과르네리 델 제수가 1741년에 만든 바이올린 등을 적외선 분광기와 핵자기공명장치를 이용해 분석했다. 실제 분석에는 수리를 위해 맡겨진 악기들의 부스러기가 사용됐다. 나자바리 교수는 “당시 악기 제작에 사용된 목재들은 산화 광물질이 포함된 액체에 삶겨진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이는 좀벌레를 죽이고 곰팡이의 성장을 막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처리로 인해 스트라디바리가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색을 갖게 됐으며 저음에서도 귀에 거슬리는 껄끄러운 소리를 막을 수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나지바리 교수는 “산화 광물질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추가 연구를 위해 악기의 목재 샘플이 필요하지만 악기 주인들이 내주기를 꺼리고 있다”며 “음색의 비밀이 완전히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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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viol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