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주자

마이클 래빈(Michael Rabin)

by violins 2008. 1. 16.
반응형

마이클 래빈(Michael Rabin, 1936-1972)은 20세기 중반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뉴욕 필하모닉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와 줄리어드 출신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음악적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절대음감 등 비범한 재능을 보였고, 바이올린으로 전향하여 이반 갈라미안과 같은 명교수에게 사사했습니다. 10세에 프로 연주자로 데뷔했으며, 13세에는 카네기 홀 데뷔 무대를 가지며 "이미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후 세계적인 연주자로 활동하며 EMI와 계약하고 파가니니, 브루흐, 차이콥스키 등 주요 협주곡과 카프리스 전곡 등 명반을 남겼습니다. 그의 연주는 벨칸토 스타일에 비유될 만큼 풍부하고 아름다운 음색과 완벽에 가까운 기교, 강렬한 표현력이 특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동에서 성인 연주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 신경증적 문제, 무대 공포, 약물 복용설 등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고, 1959년 이후로는 스튜디오 녹음을 중단했습니다. 결국 1972년,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아파트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요절하며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짧지만 강렬했던 연주 활동과 비극적인 생애는 오늘날까지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유년 시절과 음악적 재능의 발현

 

 

마이클 래빈은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1936년 5월 2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조지 래빈(George Rabin)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30년 이상 활동한 베테랑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어머니 제인(Jeanne)은 줄리어드 스쿨 출신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이러한 음악적 환경은 래빈의 재능을 발현시키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축복받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래빈은 놀랍게도 한 살 때 이미 정확한 박자를 맞출 줄 알았으며, 세 살에는 완벽한 음감을 소유하고 있음을 주변에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타고난 음악적 감각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5살까지 피아노를 배웠으나, 그의 운명을 바꾼 악기는 바이올린이었습니다. 어느 날, 바이올린을 취미로 연주하던 의사의 집을 방문했을 때, 사무실에 있던 작은 바이올린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조율하고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바이올린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마치 운명처럼 바이올린이 그를 부른 것 같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즉시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불과 다섯 번의 레슨 만에 아들의 재능이 자신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들의 비범함을 알아본 아버지는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찾아주기로 결심합니다. 래빈은 6세 혹은 7세 무렵부터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며, 한때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로부터 직접 레슨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이페츠는 어린 래빈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최고의 바이올린 교육자 중 한 명으로 꼽히던 이반 갈라미안(Ivan Galamian)에게 배울 것을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결국 래빈은 9세 때 줄리어드 스쿨에 입학하여 이반 갈라미안 문하에서 본격적인 바이올린 수업을 받게 됩니다. 갈라미안은 이후 이츠하크 펄만(Itzhak Perlman), 핀커스 주커만(Pinchas Zukerman), 정경화 등 수많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를 길러낸 명교수로, 래빈은 그의 초기 제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갈라미안은 래빈에 대해 "결코 약점이 없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재능을 인정했습니다. 어린 래빈은 스승의 지도 아래 혹독한 연습에 매진하며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하루 6~8시간 이상 연습에 몰두했다는 증언도 있는데, 이는 그의 완벽주의적인 성향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처럼 연습에만 몰두한 결과,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부족했고 다소 고립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신동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부상

이반 갈라미안의 지도 아래 래빈의 재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며, 그는 10대 초반에 이미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신동 연주자로 떠올랐습니다. 1947년, 불과 10세의 나이로 래빈은 아르투르 로진스키(Artur Rodzinski)가 지휘하는 하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Henryk Wieniawski)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며 프로 연주자로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어린 소년의 놀라운 연주에 쿠바 청중들은 열광했고, 그의 이름은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2년 뒤인 1949년, 12세의 래빈은 콜럼비아 마스터웍스(Columbia Masterworks) 레이블을 통해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의 카프리스(Caprices for Solo Violin, Op. 1) 중 11곡을 녹음하여 첫 번째 레코딩을 발표했습니다. 파가니니 카프리스는 바이올린 기교의 극한을 보여주는 난곡으로 유명한데, 어린 소년이 이 곡들을 능숙하게 연주하여 녹음까지 했다는 사실 자체가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이 곡 전곡을 녹음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루지에로 리치(Ruggiero Ricci) 정도밖에 없었을 정도로 어려운 도전 과제로 여겨졌습니다. 래빈의 이 초기 녹음은 그의 경이로운 기교와 음악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듬해인 1950년, 래빈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 중 하나를 세우게 됩니다. 바로 13세의 나이로 뉴욕 카네기 홀에 데뷔한 것입니다. 그는 레온 바진(Leon Barzin)이 지휘하는 내셔널 오케스트라 협회(National Orchestral Association)와 협연하여 앙리 비외탕(Henri Vieuxtemps)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을 연주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이 연주에 대해 "이미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다. 정말 아름답고 우아한 톤을 가졌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1951년 11월에는 15세의 나이로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Dimitri Mitropoulos)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며 다시 한번 카네기 홀 무대에 서서 청중과 평단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명지휘자 조지 셀(George Szell)은 래빈을 두고 "지난 30년간 내가 주목했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재능 중 최고"라고 격찬했으며, 미트로풀로스 역시 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래빈은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신동'이었습니다.

전성기 연주 경력과 주요 활동

카네기 홀 데뷔 이후 1950년대는 마이클 래빈의 연주 경력에 있어 황금기였습니다. 그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걸쳐 왕성한 연주 활동을 펼치며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그는 미국 국내는 물론 쿠바, 유럽, 호주 등 전 세계를 무대로 연주 여행을 다녔습니다. 1953년에는 런던에서 BBC 교향악단과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연주하여 "런던을 뒤집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연주 여행을 매우 즐겼으며, 비행 기록을 꼼꼼히 기록하기도 했는데, 그의 경력 동안 총 70만 마일 이상을 여행하며 수백만 명의 청중 앞에서 연주했습니다.

이 시기 래빈은 유명 방송 프로그램 출연과 음반 녹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NBC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벨 텔레폰 아워(The Bell Telephone Hour)'에 여러 차례 출연하여 미국 전역에 그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14세 때 처음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연주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또한, 그는 EMI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여러 중요한 음반들을 남겼습니다. 이 시기에 녹음된 음반들은 그의 짧은 전성기를 대표하는 명연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래빈의 주요 녹음으로는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브루흐 '스코틀랜드 환상곡',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글라주노프 바이올린 협주곡,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습니다. 특히 1959년에 녹음한 파가니니 카프리스 24곡 전곡 음반은 그의 경이로운 기교와 음악성을 집대성한 기념비적인 녹음으로 꼽힙니다. 이 녹음은 동시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인정받던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동시에, 후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츠하크 펄만은 자신이 파가니니 카프리스를 녹음한 후에야 래빈의 녹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만약 먼저 알았더라면 결코 녹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래빈의 파가니니 연주가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외에도 이자이(Ysaÿe)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할리우드 볼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바이올린 소품집 등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아래 표는 그의 주요 녹음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작곡가 작품명 협연/지휘/오케스트라 (해당 시) 녹음 시기 (추정) 레이블 (주요)
파가니니 카프리스 Op. 1 (11곡) 솔로 1949 Columbia
파가니니 카프리스 Op. 1 (전곡) 솔로 1959 EMI/Capitol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 Op. 6 유진 구센스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4-57 EMI/Capitol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번 F#단조, Op. 14 아드리안 볼트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4-57 EMI/Capitol
브루흐 스코틀랜드 환상곡 Op. 46 아드리안 볼트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7 EMI/Capitol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 35 알체오 갈리에라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6 EMI/Capitol
글라주노프 바이올린 협주곡 A단조, Op. 82 로브로 폰 마타치치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4 EMI/Capitol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 64 (정보 부족) 1950년대 EMI/Capitol
생상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Op. 28 펠릭스 슬래트킨 / 할리우드 볼 심포니 오케스트라 1959 Capitol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3번 "발라드", 4번 솔로 1950년대  

연주 스타일과 음악적 평가

마이클 래빈의 연주는 흔히 성악의 '벨칸토(Bel Canto)' 스타일에 비견될 만큼 풍부하고 윤기 있으며 아름다운 음색이 특징이었습니다. 그의 바이올린 소리는 마치 잘 훈련된 성악가가 노래하듯 자연스럽고 서정적이었으며, 동시에 강렬한 힘과 광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많은 동료 연주자들과 평론가들은 그의 톤(tone)이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케네스 골드스미스(Kenneth Goldsmith)는 래빈의 톤이 자신이 들어본 것 중 가장 컸다고 회고했으며, 아르놀트 슈타인하르트(Arnold Steinhardt) 역시 그의 "달콤하고 전적으로 매력적인 음악성"과 "화려한 톤"을 칭찬했습니다.

그의 또 다른 특징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기교(테크닉)였습니다. 그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스와 같은 극한의 난곡들을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유롭게 연주해냈습니다. 그의 손가락은 지판 위를 눈부시게 오갔고, 활 테크닉 역시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완벽한 기교는 야샤 하이페츠에 비견될 정도였으나, 래빈의 연주는 하이페츠의 냉철함과는 다른 따뜻함과 서정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기교를 위한 기교가 아니라, 음악적 표현을 위한 수단으로서 테크닉을 완벽하게 구사했습니다.

풍부한 감성과 표현력 역시 래빈의 연주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그는 낭만주의 시대의 협주곡이나 화려한 소품들을 연주할 때 특히 빛을 발했습니다. 비에니아프스키, 파가니니, 차이콥스키 등의 작품에서 보여준 그의 열정적이고 드라마틱한 해석은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악보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을 넘어, 작품 속에 담긴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예를 들어,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연주는 "피 끓는 듯한(red-blooded)" 열정적인 해석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신동 이미지를 벗고 성숙한 음악가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평가도 존재합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그의 연주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리기도 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평론가인 헨리 로스(Henry Roth)는 그의 후기 연주가 이전만 못하다고 평가한 반면, 아르놀트 슈타인하르트는 오히려 건강한 활력을 발견했다고 보았습니다. 1970년 샌디에이고 심포니와 협연한 브람스 협주곡 실황 녹음 등 그의 후기 연주 기록들은, 비록 전성기만큼의 완벽함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그의 아름다운 음색과 서정성, 그리고 깊어진 음악적 이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습니다. 이 연주에서 그는 이전의 화려함보다는 다소 절제되고 때로는 슬픔이 느껴지는 듯한 성숙한 해석을 선보였습니다.

후기 활동의 어려움과 비극적 요절

화려했던 전성기와 달리, 마이클 래빈의 후기 경력은 여러 어려움과 시련으로 점철되었습니다. 1950년대 말, 카네기 홀 리사이틀 도중 갑자기 무대 위에서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이후 그를 괴롭히게 될 신경학적 문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종종 균형 감각에 문제를 보였고, 이는 그의 연주 활동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동 연주자가 성인 연주자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압박감 역시 그를 힘들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쏟아진 엄청난 기대와 관심, 고된 연습과 연주 여행으로 인한 스트레스, 또래와의 교류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점차 무대 공포증과 같은 신경증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만성적인 무기력증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일부에서는 그가 만성적으로 약물을 복용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는 명확히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외적 요인들이 겹치면서 그의 연주 활동이 점차 위축되었다는 점입니다.

결정적으로, 1959년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 녹음 이후, 래빈은 더 이상 정식 스튜디오 녹음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음반 회사는 그의 불안정한 상태를 이유로 더 이상 음반 계약을 제안하지 않았고, 그는 점차 대중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물론 그는 연주 활동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니었고, 간헐적으로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1962년 피아니스트 로타 브로닥(Lothar Broddack)과 녹음한 바이올린 소품들이나 1969년 베를린 RIAS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실황 녹음 등은 그의 말년 연주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연주들은 비록 그의 전성기 때만큼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그의 아름다운 음색과 음악성은 살아있음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재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72년 1월 19일, 마이클 래빈은 뉴욕의 자신의 아파트 복도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의자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습니다. 이 사고로 인한 머리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것이 결국 그의 사망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습니다. 한때 그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전기 작가 앤서니 파인스타인(Anthony Feinstein)의 연구 등에서는 사고로 인한 머리 부상이 직접적인 사인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그의 죽음은 음악계에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유산과 영향력

마이클 래빈은 35년이라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바이올린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연주자로 기억됩니다. 그는 야샤 하이페츠의 뒤를 잇는 미국 태생의 위대한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그의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 녹음은 후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그의 연주는 완벽한 기교와 아름다운 음색, 풍부한 음악성을 겸비하여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EMI 녹음들은 오늘날까지도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필청 음반으로 꼽힙니다.

비록 그가 남긴 정식 스튜디오 녹음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CD 약 6장 분량), 그의 연주가 담긴 음반들은 꾸준히 재발매되고 있으며, 미공개 실황 녹음들이 발굴되어 발매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의 음악이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비운의 천재"라는 수식어와 함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안타까움 속에서 더욱 신화적인 존재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의 스승이었던 이반 갈라미안은 래빈을 매우 아꼈으며, 동료 바이올리니스트들 역시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래빈의 아버지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래빈이 사용하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아르놀트 슈타인하르트에게 건네주며 아들을 추억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화들은 그가 동시대 음악가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결론적으로 마이클 래빈은 압도적인 재능으로 20세기 중반 바이올린계를 밝혔으나, 내면의 어려움과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그 빛을 온전히 발하지 못한 연주자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강렬하고 아름다운 연주들은 시간을 넘어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음악적 유산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되고 재평가될 것입니다.

 

 

2024.10.14 - [바이올린 테크닉 연구] - 바이올린 왼손 피치카토 쉽게 하는 법

 

바이올린 왼손 피치카토 쉽게 하는 법

왼손 피치카토의 기본과 활용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다양한 주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왼손 피치카토는 특별한 매력을 지닌 주법입니다. 일반적으로 피치카토는 오른손으로 현을 튕

violins.tistory.com

2024.03.16 - [바이올린 테크닉 연구] - 바이올린 자세 교정을 위한 거울 활용법

 

바이올린 자세 교정을 위한 거울 활용법

바이올린 자세 교정을 위한 거울 활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올바른 자세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연주 시 어깨, 팔꿈치,

violins.tistory.com

2023.06.28 - [음악] - 프랑크 - 바이올린 소나타

 

프랑크 - 바이올린 소나타

오늘은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곡가인 세자르 프랑크(César Franck, 1822-1890)의 바이올린 소나타(Sonata in A major for Violin and Piano)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프랑크는 벨기에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violins.tistory.com

 

현재 하버드, MIT, 칼텍, 스탠포드, 프린스턴을 포함한 전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공학, 생물학, 의학을 가르치는 1,000여 명이 넘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다윈 진화론의 과학적 허구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여기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의 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진화론을 지지하는 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지능의 문제입니다.

1. 한 고대 문서 이야기
2. 너무나도 중요한 소식 (불편한 진실)
3. 당신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
4. 신(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5. 신의 증거(연역적 추론)
6. 신의 증거(귀납적 증거)
7. 신의 증거(현실적인 증거)
8.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반응형

'연주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고산  (0) 2008.01.18
장영주(Sarah Chang)  (0) 2008.01.17
로랑 코르샤(Larent Korcia)  (3) 2008.01.15
레오니드 코간(Leonid Kogan)  (0) 2008.01.14
바딤 레핀(Vadim Repin)  (1) 2008.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