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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

by violins 2008.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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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페츠는 항상 나의 우상이었다. 소년시절의 나는 하이페츠의 초기 녹음들을 들으며 자랐다. 하이페츠는 당시에도 유명했고, 그 후에도 여전히 위대했다. 이제 내가 늙어 그 음반들을 다시 들으며 생각해 보니 그 언제보다도 더욱 위대하다.”
                                                                                                - 요셉 긴골드
                                                                                                                 
“1890년에서 1905년 사이에 태어난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몰락해 버리는 처지가 되었다. 세계의 모든 오케스트라와 음악학교는 모두 하이페츠의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바이올리니스트를 평가하는 기준이 훨씬 낮아졌을 것이다.”  
                                                                                                - 헨리 로스
                                                                                                                               
“역사적으로 절대 완벽한 연주자는 아직 없었다. 그래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하이페츠가 유일한 예다.”
                                                                                                - 칼 플레쉬  

 

 바이올린 애호가들로부터 전문 연주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기호를 떠나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를 한명 꼽으라면 대부분 야사 하이페츠를 거론할 정도로 그가 바이올린으로 이룬 업적은 방대한 동시에 위대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독보적 입지가 너무나 커서인지, 하이페츠와 견줄 연주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한 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살아 생전에 전설로 남은 연주자 하이페츠, 그의 이름은 모든 바이올리니스트, 아니 모든 연주가들에게 있어 '강박관념'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연주는 한마디로 인류 역사상 겨우 몇몇 만이 도달할 수 있는 '완벽 그 자체'의 경지에 이르렀던 연주자였다. 완벽한 테크닉으로 악보 속의 모든 음표를 하나도 빠뜨림없이 악보 밖으로 뿜어내는 정교함, 폭넓은 표현과 탁월한 균형감각, 작품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통찰력, 강력한 보잉과 강렬한 비브라토, 자유자재의 템포 조절력 그리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집중력, 그의 완벽한 연주를 접하고 나면 보통 연주가들은 '모차르트 앞에 선 살리에리'를 이해하게 된다.


 사실 현대에도 정말 뛰어난 연주자는 너무 많다. 흔히 이런 뛰어난 연주자들을 묘사하는 위해 '믿을 수 없는 연주', '환상적인 테크닉' 등등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야샤 하이페츠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잡다한 수식어구가 필요가 없다. 단지 '완벽'이라는 단어 하나면 충분하다.


 하이페츠는 20세기가 시작되던 1901년 2월 2일 러시아의 빌나(Wilna)에서 태어나 3살때 바이올린을 손에 잡았다. 6세때 멘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으로 최초의 공개 연주회를 가졌으며, 이후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어 9세때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명교수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von Auer, 1845-1930, 러시아)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아우어는 바이올린 음악사에서 20세기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인 밀스타인, 짐발리스트(Efrem Zimbalist, 1889-1985, 러시아), 엘만(Mischa Elman, 1891-1967, 러시아) 등을 길러내 '러시아악파'라는 계보를 이룩한 19세기 후반 명바이올리니스트이자 명교육자로, 차이코프스키가 바이올린협주곡을 헌정하려 했으나, '연주 불가능'이라고 작품을 평가절하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이페츠는 만일 아우어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전설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전에 말한 바가 있고, 또한 아우어 교수의 탁월한 음악교육에 찬사를 보내면서 "신동으로 대접받는 것은 질병과 같은 것이며 치명적인 것이다. 나는 운좋게도 겨우 살아남은 몇 안되는 신동이라 불리우던 사람이었으며, 이는 전적으로 위대한 음악스승인 아우어와 음악을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 덕분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1912년, 11살의 하이페츠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 및 교향악단과 협연을 하게 된다. 바로 니키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협주곡을 협연하였고, 이것은 전설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라이프치히에서 브루흐의 바이올린협주곡을 연주하는 12살의 하이페츠를 본 당대 최고의 거장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62, 오스트리아)는 역시 당대의 거장 짐발리스트에게 말하기를 "자네나 나나 이제는 바이올린을 내 던져 박살내는 편이 나을 것 같네"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렇게 유럽 각지에서 천재성을 과시하던 그는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데뷔연주회를 가졌고, 미국에서의 데뷔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후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은 결국 하이페츠는 그대로 미국에 눌러않게 만들었다. 20대에 이미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그는 1925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으며, 1940년에는 비버리힐즈에 평생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의 나이 19세되던 1920년, 런던 데뷔 무대를 본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 '제발 잠들기 전, 기도 대신 아무 곡이나 서툴게 연주해라. 인간으로 태어나 그렇게 신처럼 완벽하게 연주하다간 자칫 하느님의 시기로 요절할지도 모른다'고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그의 존재 이후 그동안 '19세기의 것'이던 연주 스타일은 '20세기의 것'으로 변했버렸다. 즉 하이페츠에 의해 바이올린 해석의 '20세기 스타일'이 만들어졌고, 많은 연주자들이 그의 스타일을 추종하였다. 이로 인해 하이페츠보다 나이에서 한 세대 앞서 전성기의 나이를 맞은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 빛을 잃고 일찍 무대를 떠나 교육자로 전환한 경우도 많았다.


 사진이나 비디오로 남아있는 하이페츠의 연주 모습을 보면 매우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꼿꼿이 선채로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들고 거의 무표정한 상태을 끝까지 유지하며 연주에 몰입한다. 그래서인지 하이페츠의 연주는 '차갑다', '메마르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RCA레코드사의 찰스 오코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누군가가 하이페츠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의 정교한 손놀림 때문일 것이고, 또 누군가가 하이페츠를 가리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이페츠가 언제나 음악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본능과 같은 분석력이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그래도 또 누군가가 그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렇다, 그는 차가운 사람이다" 라고 말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처럼 자신의 감정을 탁월하게 조절하는 음악가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이페츠의 활잡는 방식은 활을 팔목 상부에 놓고 집게 손가락의 누름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아우어 교수의 방식이었다. 몸에서 떨어진 좌우 팔꿈치가 현에 강한 압력을 더해 주었다.(러시아악파 이전의 활주법은 집게 손가락의 누름을 강조하지 않았고, 오른팔꿈치도 높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요아힘의 계보를 잇는 독일악파의 경우는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이기도 했다.) 거기에다 팔목과 팔을 움직여 내는 빠른 비브라토가 더해져 강렬한 빛을 발했다. 이같은 연주법상의 개성과 함께 하이페츠는 극도의 집중력과 대담함, 가까이 하기 힘든 위엄, 완벽한 콘트롤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그의 소리는 힘이 넘쳤고 당시의 바이올린계에 따라다니던 애수어린 감상적인 소리를 제거해 버렸다.


 하이페츠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의 연주가 너무 빠른 나머지 편하게 감상하기엔 어렵다는 것과 그의 음색이나 비브라토 등이 너무나 격렬해서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의 연주는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보다 1.5배 정도 빠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단순히 허겁지겁 '빨리 켜는 것'에만 골몰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하이페츠는 그 놀라운 속도에서도 정확한 음정과 발군의 활 제어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탁월한 왼손의 컨트롤로 인해 사실상 그 패시지에서 '보여줄 수 있는, 그리고 해야하는 모든 것'을 다 해내고 있다. 그의 음악에서 느끼는 강렬함은 바로 손가락의 마디를 사용한 비브라토와 톡특한 러시아스타일의 활기법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스턴, 그리고 펄만 같은 대가들이 왜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하이페츠 연주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다고 하는지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펄만이 브루흐의 <바이올린협주곡 1번>과 <스코틀랜드환상곡>을 녹음하기 전, 기자가 왜 당신은 브루흐의 바이올린 작품을 녹음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 곡은 이미 하이페츠에 의해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녹음이 있기에 하지 않고 있다는 대답은 하이페츠가 20세 중반 이후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하이페츠는 솔리스트로서의 활동 외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루빈스타인, 역시 최고의 첼리스트였던 포이어만과 더불어 이른바 '백만불짜리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 연주활동도 하였다. 이 트리오는 1942년 포이어만이 사망한 후에도 피아티고르스키를 영입하여 수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명성과는 달리 이 트리오의 연주는 그다지 깊은 조화를 들려주지 못하였는데, 루빈스타인의 말을 인용하면 "순전히 하이페츠의 음색과 고집 때문"이었다고 한다.


 셰링(Henryk Szeryng, 1918-1988, 폴란드), 골드베르크(Szymon Goldberg, 1909-1993, 폴란드), 로스탈(Max Rostal, 1905-1991, 오스트리아), 모리니(Erica Morini, 1904-1995, 오스트리아) 등의 스승으로,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했던 20세기의 명교수 칼 플레쉬(Carl Flesch, 1873-1944, 헝가리) 마저도 "역사적으로 절대 완벽한 연주자는 아직 없었다. 그래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하이페츠가 유일한 예다."라는 말은 하이페츠의 연주를 평가하는 결정적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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