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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독하게’ 가르치고 남은 열정으로 ‘행복한’ 연주 - 김남윤

by violins 2008.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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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클래식 음악의 큰 별 셋하면 피아니스트 신수정 전 서울대 음대 학장, 이경숙 연세대 음대 학장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원장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김 원장은 뛰어난 곡 해석과 함께 섬세하면서도 다이내믹한 연주로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전문 연주자 시대를 연 바이올리니스트로 평가된다.

그는 또 뛰어난 음악 교육자로 백주영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김지연, 권혁주씨 등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를 길러냈으며 퀸엘리자베스,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 등 세계적인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 원장은 17일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이경숙, 신수정 학장에 이어 ‘동반’이라는 주제로 ‘마이 라이프, 마이 뮤직’ 시리즈 세 번째 무대를 갖는다.

다음 무대는 ‘선물’을 주제로 12월15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02-580-1300) 14일 오후 서울 서초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3층 김 원장의 연구실에서 만나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해 들었다.


그의 연구실은 단출하다 못해 ‘삭막’해 보였다. 그랜드피아노 하나와 보면대, 책상 하나에 딱딱한 의자 셋, 그리고 책꽂이가 전부다. 아티스트들에게 흔히 있는 멋지게 찍은 기념 사진이나 포스터 등 장식품이 하나도 없다. 이번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 하나만 달랑 문에 붙어있을 뿐이다. 차림새도 민얼굴에 스웨터 차림이다.

“제가 꾸미는 것을 안 좋아해요. 성격이 게을러서 화장도 안해요. 액세서리는 더 그렇구요, 사진 찍는 것을 제일 싫어 하구요, CD 녹음도 안합니다.”

꾸미지 않는 것과 화장 안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 데 CD녹음까지 하지 않는 것은 잘 연관이 안됐다. CD커버 사진찍는 게 싫어서 그럴까.

“여러번 연주해서 좋은 녹음으로 편집하잖아요. 그것을 들을 때 무안해요. 저거 내가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솔직한 것이 분명 미덕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결벽증에 가깝다. 이런 솔직함으로는 약간의 정치가 필요한 사회생활을 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많이 나아진 게 이래요. 학부모들이 와서 ‘재주가 없는 데 바이올린을 계속 시켜도 될까 모르겠어요’라고 겸양하면서 물어볼 때가 많잖아요. 요즘엔 잘 안그러지만 처음에는 ‘잘 생각하셨어요. 바이올린 이거 비전도 없어요. 큰 재능도 없는 데 다른 것을 시키세요’하고 솔직하게 말했거든요. 그러면 정말 홱 삐치더라구요. 그런 불필요한 솔직함이 오해도 많이 불렀고, 구설수에도 많이 올랐지요.”

요즘도 그렇지만 전쟁 직후 지방에서 바이올린 하기가 쉽지는 않다. 초등학교 2학년말 3학년초에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도 늦다. 그러나 ‘독하게’ 공부해 세계적 권위의 스위스 티보바가 콩쿠르에서 1위하며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로 우뚝 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거 그냥 하는 말이에요. 부끄러워요. 늦게 시작한 것은 맞지만 피나는 노력 같은 것은 안했어요. 세계적 연주자도 아니에요. 정경화 선생님이 저보다 앞서 레벤트리 콩쿠르에서 우승하셨고, 강동석 선생의 활약도 눈부셨지요. 저는 그냥 열심히 살았고, 맡은 일에 충실히 했을 뿐입니다.”

절대 ‘독하게’하지 않았다는 설명인데 정말 ‘독하게’ 했을 것 같다.

“대부분의 어린이들 처럼 하기 싫은 적이 많았어요. 엄마의 ‘강요’에 의해 많이 했습니다. 유학가서 세계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철이 들어 저를 푸시(push·밀어붙여), 이만큼 됐지요. 그저 부모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한국 어머니들의 교육열은 그 때나 지금이나 세계적 수준이다. 김 원장을 만든 것도 흔히 ‘극성’으로 표현되는 그 한국 어머니들의 열정이다.

“당연하지요. 어린애가 자진해서 열심히 하는 애가 1000명에 하나나 있겠어요. 부모님 중의 한 분이 열정적으로 지원을 해야죠. 이를 흔히 ‘극성’이라고 하는 데 저는 그 말이 싫어요. 정말 열심히 잡아주지 않으면 (좋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김 원장은 “부모님이 독하고 강해야 한다”며 전통적인 스파르타식 교육을 강조했다.

“우스개 반, 진실 반 섞어 말합니다. 자식들의 인격을 너무 존중하지 말라고요. 대화로 애가 정말 잘하기는 어렵거든요. 힘든 노력하지 않으면 좋은 음악가 하나 나오기 힘듭니다. 강해야 합니다. 겉으로만 강한 게 아니고 속으로도 강해야 합니다. 어려운 시기가 많아요. 여러번 울어야 하고요.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도 필요합니다. 이때 부모님이 강하게 붙잡아 줘야 해요. 부모님이 못하면 선생이라도 해야죠.”

학부모에 대한 요구에 이어 학생들에 대한 비판도 매섭다.

“좋은 음악가를 만들려면 여러 요소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노력이 특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애들을 보면 꿈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다그쳐가는 성취욕 같은 게 부족합니다. 저희 때 만큼 강하지 못한 것 같아요. 확실히 좀 해이해졌다는 느낌도 들어요. 음악은 박사학위를 따는 것 같이 어느 단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해야하는 지루한 과정이에요.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돼요. 좋은 경험, 나쁜 경험, 많은 아픔을 겪어야 좋은 음악이 나옵니다. 부모님들이 자식을 좀 더 강하게 키워야 해요.”

김 원장은 “딸을 솜보따리 위에서 예쁘게만 키워 시집보내려 하는 데 요즘 세상이 달라졌다”며 “엄하고 강하게 키워야 결혼도 잘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요즘 하나 아니면 둘을 낳으며 너무 오냐 오냐 키우는 데 귀한 자식일 수록 엄하게 키워야 한다”며 “그렇지 않은 엄마를 보면 나는 엄마를 막 야단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주회 주제가 ‘동반’과 ‘선물’이다.

“제가 만든 주제는 아니에요. 예술의전당에서 만들었는데 참 좋은 주제 같아요. 제가 1976년부터 경희대서 5년, 서울대서 10년을 가르치다가 음악원 설립 때부터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데 제자들이 참 많아요. 경희대 정준수 교수 같은 경우는 저와 여섯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요. 제자가 아니라 같은 50대로 ‘같이 늙어가는 친구’들입니다.

이경숙 학장은 경희대 교수도 함께 한 친언니와 다름 없는 분이에요. 참 많은 일을 겪으며 항상 가깝게 느끼는 듬직한 언니지요. 예술과 인생의 동반자들과 함께 꾸민 무대입니다. 저는 또 초등학교 1학년 제자들도 있어요. 걔들은 정말 제 인생의 ‘선물’들이에요걔들은 보기만 해도 즐겁고, 연주까지 잘하면 정말 행복하답니다.”

이번 연주회에 김 원장이 마련한 ‘선물’은 다음달 15일 공연 마지막에 이들 100명이 들려주는 바이올린 연주다. 객석 324석의 소극장에 어떻게 100명의 연주자가 설 수 있느냐고 했더니 극장 객석표를 꺼내며 “무대와 2, 3층 객석에 죽 돌려서 연주할 계획”이라고 설명하는데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

정말 그는 이제 연주자가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역할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백명이 훨씬 넘는 제자들을 무대에 올리고도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프로그램을) 짜다 보니까 시키고 싶은 제자가 너무 많고, 아깝게 빠진 제자도 많아 속상해 죽겠어요. 제자들을 더 시키고 싶은 데 주최측에서 자꾸 해달라고 해 이경숙 학장님, 첼리스트 나덕성 선생님과 베토벤 트리오 4번 등 2곡을 하기로 했어요. 정말 같이 해야 할 사람이 빠져 내 마음이 너무 섭섭해요.”

그는 좋은 연주자이며, 교육자다. 또 세계적 콩쿠르 심사위원을 역임한 훌륭한 평가자이기도 하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음악은 어떤 음악일까 궁금했다.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음악입니다. 테크닉이 우선 깨끗해야 하겠지만 테크닉만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못 움직여요. 듣는 사람이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집중시키는 음악이 좋은 음악입니다.”

지금 한국 클래식 음악 수준은 어디쯤 있을까.

“세계 톱클래스 입니다. 그냥 톱이 아니라 월등한 톱입니다. 저희 학교 자랑은 아니지만 음악원이 생긴 이후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저희 학교에서 국제 콩쿠르에 1등 해 벽에 붙여 놓으면 학생들도 ‘또 누가 탔구나’ 정도로 생각해요. 웬만한 콩쿠르 아니면 별로 관심도 안가질 정도입니다.”

그는 원인을 스파르타 교육에서 찾았다.

“저는 애들 엠티(MT·Membership Training)도 안보내요. 졸업연주회에서 13,14명이 연주하면 1,2명은 떨어질 정도로 엄격합니다. 3,4학년에 그만 두는 애들도 적지 않고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어요. 웃기는 이야기지만 저도 아이들 가르치고 집에 가면 그냥 쓰러집니다. 연주 연습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래서 최근 그의 연주회가 드문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잘 준비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못했는데 요즘은 하고 싶은 생각도 들어요. 더 늙기전에, 아직 손가락 돌아갈 때 해야죠.”

김 원장은 지금 자신의 시간의 99%를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나머지 1%에 집중, 연주자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한국 음악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물었다.

“전반적인 것은 저 몰라요. 바이올린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좀 세계적인 흐름을 알았으면 합니다. 제가 세계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없는 시간을 쪼개 나가는 것은 그들을 배우기 위해서예요. 저렇게 하는 프레이징(phrasing·악구)도 있구나, 저런 보윙(bowing·바이올린 활쓰는 법), 저런 핑거링(fingering·손가락쓰기)도 참 좋다 하는 식으로 새로운 것을 배워 아이들에게 전하지요.”

그는 또 “너무 음악에만 매달린다”며 “연습 끝나면 델레비전 보지 말고 오페라도 보고, 발레도 보고, 뮤지컬도 보고 배우며 느끼면서 시야를 넓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 원장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누가 내게 무엇을 잘하느냐고 물었을 때 죽기전에 한번 ‘바이올린 좀 한다’는 대답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 내놓고 가고 싶다”며 “내 바이올린도 학교에 기증할 건데 어린 학생이 이걸로 연주하는 상상만 해도 행복해진다”고 정말 너무 행복한 듯 몸을 떨었다. 지금 그는 세계적인 연주자도, 심사위원도 아니었다. 엄격하면서도 속살이 부드러운 ‘음악의 페스탈로치’였다.

김남윤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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